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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고요함의 유혹, 일본 고야산

가을, 티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밑에 있는 사람이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높고 곧은 나무들이 쭉 뻗어 있었다. 못해도 수백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듯 하다. 나무 그늘 밑으로 꽉 들어 찬 무덤과 비석들. 각기 다른 모습의 절. 길 사이사이를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명 관광지치고는 신비할 정도로 경건한 그 곳. 일본의 고야산이다.


오사카에서 전철을 타고 한시간 반쯤 갔을까? 경사진 산등성이를 쭉 타고 오르더니 조그마한 역에서 내렸다. 웅성웅성 내리던 사람들과 역 앞에 있는 버스를 갈아타고 얼마쯤 지나 도착지에 내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왠지 설렌다.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생일 초대를 받은 기분이랄까. 꽉 들어찬 키 큰 나무들과 이제 시작되는 가을 속으로 조금씩 물들어가는 단풍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무도 알아보지 않는 낯선 곳에서 홀로 푹 껴안는 여행 풍경에 빠진다.


그런데 사실 뭐 그렇게 낭만적인 곳은 아니다. 20만기가 넘는 무덤이 있는 곳이다. 불교의 수행장소가 되기 시작한 819년부터 점차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고야산은 자유와 낭만보다는 경건과 수행의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지친 일상을 떠나, 짧지만 깊은 쉼을 누리기에 더 적합한 곳일 수 있다.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무덤들을 보면 문득 숙연해진다. 고야산에는 일본 전국시대를 누렸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케다 신겐 등의 묘지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들도 이젠 이끼 낀 무덤의 주인으로 남아있다.



오래된 삶의 흔적. 삼나무 사이로 내리는 햇살이 이끼 낀 무덤과 비석을 비춘다. 

옛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남부 간사이 지방에는 불교 성지가 많다. 특히 요시노산, 오미네산, 구마노산, 고야산에 신사와 유적이 남아 있다. 그 곳을 잇는 길이 구마노고도이다. 옛부터 일본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구마노고도를 따라 성지를 순례했다. 천년의 순례길이었다. 동양의 산티아고 길이다. 2004년부터 그곳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다른 성지들 보다 고야산이 특별한 이유는 ‘죽음’이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인 듯 싶다.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들이 있지만, 그보다 고야산 자락을 가득 매운 무덤 숲을 지날때 느끼는 뭔가가 오래 전 부터 사람들을 고야산으로 끌어드이는 힘이라 생각된다.

굵직한 인생을 살다가 이젠 세월 속에 흩어져버린 이들의 흔적. 그 죽음의 상징들 앞에서 되돌아보는 자기 자신, 그 순간 조금씩 모아지는 조각났던 삶의 기억, 아련하게 비치는 인생의 의미. 이것이 화려하진 않지만 천년동안 사람들의 발길을 잇게 하는 고요한 유혹이 아닐까.

높은 빌딩과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한 바쁜 도심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면 조용히 고야산을 찾아 떠나도 괜찮다.

20만기의 무덤이 자리한 오쿠노인 입구. 높고 높은 삼나무 길이 이어진다. 고야산 여정의 시작이다.

가을빛으로 옅게 물든 고야산의 풍경. 살랑이는 바람과 알록달록한 단풍이 즐겁다.

길을 따라 계속 무덤 숲을 걷는다. 곳곳에 놓은  안내판들이 잠시나마 먼저 간 이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근처 절에서 향을 피워 햇살이 하얗게 부서진다. 깊은 삼나무 숲의 아늑한 정취

조금씩 부서지는 돌 위로 파란 이끼가 피어 있다. 죽음의 기억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풍경 한 조각.

두 스님이 길을 가다 사찰 앞에 서 인사를 한다. 사뭇 진지하고 경건한 모습이 고야산을 닮았다.

 화려함도 있다. 주황빛이 총총이 드러나는 단조가란. 파란 하늘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자태다.


단청을 하지 않은 숲 속의 사찰. 고야산 안에는 사원 수가 117개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절반은 승려가 생활하는 곳.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곳도 있으니 고야산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좋다.

이름 모를 어느 사찰 앞에 가만히 흘러가는 가을 풍경

고야산 다이몬. 다이몬은 대문이라는 뜻이다. 예전 순례객들을 맞이하던 고야산의 입구. 힘겹게 순례길을 걷다 마주하는 이 문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전철로 편하게 왔다가는 나 같은 여행객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를 더 가슴에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