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가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시초]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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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였던 시인, 그의 저린 울림
낯선 이를 만났지만, 그 낯선 이가 반갑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같은 나병환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길을 가다 나병환자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반가웠을까?
아닐 것이다.
착한 척하며 측은해 하고 안타까워하고 힘내라 하는 눈빛만 보였을 것이다.
그럼 마주 오던 나병환자의 기분을 어떨까?
반가울까?
예수는 왜 사생아로, 식민지 백성의 신분으로 세상에 왔을까.
석가모니는 왜 왕족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가장 낮은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 왔을까.
쩔룸거리며 발가락 떨어져 나가도 걸어가야 하는 길.
그 길을 어떻게 해야 걸어야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시인은 소록도로 걸어갔다.
가도 가도 천리길, 먼나 먼 길이었는데.
이 세상에 온 이상 모든 사람들은 숨 막히는 황톳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는데,
그 황톳길을 제대로 걸어 갈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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