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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시

라일락꽃_도종환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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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너무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삭막한 사회가, 불합리한 세상이, 그리고 그걸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이라도 당했다던가,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무능력하다는 생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며들 때,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어느새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슬며시 변해버린다.

인간은 도대체 뭘까, 하는 고민도 치밀어 온다.


시인은 말한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고,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빗줄기를 홀로 휘청휘청 맞아대고 있더라도,

결코 빗방울은 꽃의 향기와 빛깔을 빼앗지 못한다고.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고백한다.

욕망의 속삭임에 이끌려 잠시 눈이 어두워지고 결국 에덴동산을 떠나게 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인간은 온전한 죄인이거나 악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신의 형상, 완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절망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와 빛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가에서도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름다운 꽃이 핀 자리에 주룩주룩 비가 쏟아져 내릴 때,

어떤 사람은 내리는 비만 바라보며 차갑게 젖어가고 있는 꽃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비 속에서도 잃지 않는 꽃의 향기와 빛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가끔 나한테만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아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무엇을, 어디를 보아야 할까.

이토록 괴로운 것은 증오와 절망 속에서 추적거리는 비만 바라보고 있었던 까닭일까.

내리는 비 가운데서도 지워지지 않는, 지워질 수 없는 것,

내 안에, 사람들 안엔 그런 향기와 빛깔이 있을텐데.

나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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