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과 한결의 사상 : 겨레 학문의 선구자(박영신)를 읽고
외솔 최 현배와 한결 김 윤경은 모두 한글에 한 평생을 바친 한글학자이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시대를 온전히 살았던 그들이 빼앗긴 나랏말과 글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단순한 학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시대에 한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회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보지 않고, 교육에 대한 뚜렷한 생각의 바탕을 가지고 평생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는 점에서는 교육 사상가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외솔과 한결의 사상 : 겨레 학문의 선구자, 박영신』를 바탕으로 외솔과 한솔의 사회와 교육에 대한 생각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책에서 초첨을 맞춘대로 내용을 정리한 후에, 몇 가지 사회 이론의 눈으로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 볼 것이다. 어떠한 논리와 틀로 사람의 삶과 생각을 규정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지만,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풀어볼 것이다.
가. 외솔의 삶과 생각
1. 외솔의 삶
외솔 최 현배는 1894년에 태어나 1970년까지 살았다. 그는 5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부터 동네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다. 13살에는 경남 동래에 새로 세워진 일신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 일신학교에서는 배우는 학생이면서도 가르치는 일을 같이 했다. 졸업 후 서울로 와서 한성고등학교에 들어가 4년 동안 공부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빼앗기자 외솔은 일본 사람들이 주관하는 학교 테두리에 갇혀있는 것은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외솔은 같은 고향 선배인 김 두봉을 따라 보성학교에 차리고 있던 주 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 일요일마다 나가 나라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외솔은 이 강습원의 제 1회 졸업생이 된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관비 유학생으로 가서 4년 동안(1915년-1919년) 교육학을 집중 공부했다.
관비 학생은 관립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외솔은 병을 핑계 삼아 관립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피하였다. 고향으로 휴양을 한 후 다음 해부터 민립 학교인 동래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이 되어 2년 동안(1920년-1921년) 가르치는 일을 한다. 이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한글 역사에 길이 남는 그의 저서 『우리말본』의 초고를 썼다. 외솔은 일을 그만두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철학과에서 3년 동안 정식으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 논문으로 ‘베스달로찌이의 교육학설’을 쓰고 대학원에 들어가 1년(1922년-1926년)을 더 연구했다. 돌아와서는 연희 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평생했다.(68)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해에 지어낸 것이 『조선민족 갱생의 도』이다. 이 글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동아일보」에 나누어 실은 다음, 1930년에 단행본으로 나왔다. 1937년에 쓴 『우리말본』과 1940년에 쓴 『한글말』을 비롯해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수많은 책을 쓰면서 우리 역사에 견줄 데 없이 우뚝 솟은 봉우리로 남게 될 한글학자로 알려진다.
2. 외솔의 사회에 관한 생각
글쓴이는 외솔에 관한 이야기의 흐름을 ‘한글학자’에서 끝내지 말고 더 넓혀야 한다고 말한다. 민족공동체의 사회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한 외솔은 한글학자를 넘어 사회 사상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사회사상가로서의 외솔의 됨됨이를 특별히 『갱생의 도』에서 찾고 있다. 일제 강탈기에 민족에 대한 생각을 체계화한 글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식민시대의 한 사람이 일본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던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일하고 싶은 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싶고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을 적어보고자 한 목적을 가지고 외솔이 붓을 들게 됐다고 글쓴이는 정리한다. 따라서 『갱생의 도』를 살펴보는 일은 사회를 바라보는 외솔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음직하다. 『갱생의 도』는 첫째로 쇠약한 민족의 질병을 진단하고, 둘째로 그 원인을 밝히어, 셋째로 갱생의 원리를 찾아, 마지막 넷째로 이를 위한 노력으로 짜여져 있다. 책의 구성만 보아도 허황된 책상머리의 글이 아닌 현실에 깊숙이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변화와 실천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갱생의 도』에서 외솔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가득한 조선의 상황을 감상스럽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롭고 분명하게 문제를 드러내려고 노렸했다. 이 책의 머릿글에서 외솔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하는 “외부 사회 조직”의 문제 때문에 조선 민족이 “비참하게도 쇠잔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생기”이다. 외솔은 “사회 조직의 여하는 물론하고, 생기의 왕성한 민족은 흥할 것이요, 생기의 미약한 민족은 망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 마디로 사회를 구성하는 어떠한 틀과 구조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알거나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외솔은 조선 민족이 ‘질병’에 걸려 아파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민족성 속에 모든 문제가 들어있다는 ‘패배주의’에 빠져 들진 않았다. 조선 민족이 걸린 질병은 외솔은 자세하게 나눴는데, 민족의 의지가 굳세지 못하고, 용기가 없으며, 활동력이 부족하고, 신념이 부족하며 도덕심이 땅에 떨어졌으며, 정치와 경제가 파멸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외솔이 생각한 질병의 원인은 홍 이섭이 적절하게 이름 붙이고 있는 것처럼 크게 두 가지 생각과 이어진다. 하나는 ‘반 식민지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반봉건’인식 이다. 일제가 조선 민족의 정치와 경제를 빼앗은 것과 조선의 역사 속에서 구조화된 폐해들이 질병을 낳고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일제 강탈기의 조선의 상황에서 더욱 냉철하게 ‘질병’의 내용과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외솔의 지성과 도덕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성찰하는 민족주의’ 때문이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외솔은 시대 상황에 대한 분석 수준으로 이야기를 끝마치지 않았다. 그는 민족의 생기를 가다듬어 일으키고, 민족의 이상을 세우고, 민족의 ‘시대 이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윤리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민족 스스로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에 대한 ‘자각’과, 그 자각을 통한 주체가 되어 반성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외솔은 첫째로 ‘경제 조건’을 이차의 것으로 내세우는 ‘경제 중심’의 의식 상황 과 둘째로 ‘일가일족’이라는 ‘가족 중심’의 가치를 ‘갱생’해야 할 중요한 요건으로 보았다. ‘경제’와 ‘가족’ 을 중심으로 두는 가치와 의식에 삶의 지향성과 사회의 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외솔은 갱생의 가능성은 아래로부터의 꿈틀거림으로 보았다. 민족의 운동은 몇몇 상층부 인사들의 수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운동이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외솔은 마음가짐만 가지고 인간 생활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생활은 유심도 아니요, 유물도 아니라”고 보았다. 사회와 경제의 요소도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아니라, 깊은 수준에서 ‘삶을 살아나기’ 위한 문화의 싸움이 갱생을 위한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사회 변혁에 참여하는 것은 물질 조건에 기계처럼 반응하는 타율성이 아니라 주체의 능동성이다. 외솔은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 변동에 의식과 목적에 따른 활동으로써 역사의 기관차를 운전하는 것밖에 다른 직능이 없다고 보았다. 이것을 외솔은 ‘실천하는 이상주의’라고 보았다. ‘이상’을 세우고 열심으로 ‘이상’을 이룩해나가는 끝없는 싸움, 곧 ‘분투주의’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외솔의 생각은 문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나라의 말과 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이 바로 갱생의 도를 생활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화를 통해 일제의 총칼에 투쟁했다. 생기 왕성한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의 문화 특성을 담고 있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었다. 그가 교육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사회 사상가로서 깊은 생각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3. 외솔의 교육에 관한 생각
외솔은 평생 교육의 테두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살리고,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도덕의 요청에 때문이었다. 외솔은 일제시대에 정치에 대한 개혁 운동이 좌절을 겪게 되자 교육 운동에 헌신하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교육에 깊은 열정을 가졌다. 그는 “나라의 독립 자유를 얻자면 모름지기 먼저 민족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하여야 하겠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교육은 민족과 사회를 개조하는 근본책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은 바로 이런 것이다.
외솔은 교육학 중에서도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을 체계세우고자 했다. 조선의 페스탈로치가 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페스탈로치는 자연스런 ‘원시’ 인간이 ‘도덕’ 인간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워 자신의 생각을 직접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간 영혼의 더욱 깊은 곳에 이르고자 노력” 했으며, 도덕과 종교의 힘을 믿고 개인과 사회의 삶이 점차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페스탈로치의 영향으로 외솔도 “아낙스런 높힘”을 강조한다. 거대한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부터 바뀌어 나가는 것을 지향한 것이다. 외솔은 나라를 되살리는 길을 ‘아낙의 힘’의 치유로 보았다. 겉의 조직에 의해 민족이 흥하고 쇠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육은 ‘아낙스런’ 자발성과 자율성, 곧 창조력을 끌어내고 살려내는 일이다. 하지만 외솔의 교육 목표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 향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기심의 족쇄에서 해방된 자유 곧 이타심이 활동”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보았다.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도덕성을 키우고,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살음은 사람으로 사는 일 사람답게 사는 일”이며 “ 사람은 자연 생물인 동시에 도덕 존재”이기 때문에 “제몸만 살랑하지 않고, 남도 사랑할 줄 알며, 제 한 몸의 이익만 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돌보는 데에 진정한 사람의 살음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외솔에게 있어 교육은 “이웃 사람을 사랑할 줄을 배우는 것, 남을 섬기기를 배우는 것”이었다.
나. 한결의 삶과 생각
1. 한결의 삶
한결 김 윤경은 1894년에 태어나 1969년까지 살았다. 경기도 광주가 고향인 한결은 만 4살이 되면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12살이 되던 해(1906년)에 아버지를 따라 집안 모두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 14살이 되던 해(1908년)부터 서울로 옮겨와 신식 학교에 다닌다. 17살이 되던 해(1911년)에는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주 시경에게서 한글을 배운다. 23살이 되던 해(1917년)에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서 2년 동안 공부를 하다가 만세 운동을 한 후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농촌에 내려가 지낸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이었던 1921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창립회원이 된다. 1922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배화 여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 1926년에 일본 릿교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다. 한글 연구사에 길이 빛날 연구서로 자리매김한 『조선문자급어사, 1938년』는 릿교대학 졸업 논문에서 비롯되어 나온 글이다. 1937년에는 동우회 사건을 잡혀 재판 받고 감옥살이를 한 1년 2개월을 합쳐 5년 동안 배화 여자고등학교 교원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1942년에는 성신가정여학교 교사로 뽑혔으나 그 해 가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르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서대문경찰서에 15일 동안 구치되고, 다음 해 군사 정권이 만든 교육임시특례법에 의해 1962년 연세 학원을 정년퇴직한다. 다음해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다가 76살이 되던 해(1969년)에 세상을 떠난다.
2. 한결의 사회에 관한 생각
글쓴이는 한결의 생각이 남달리 깊기에 우리는 역사에 살다 간 ‘사상가’로 정의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인격과 성품이 좋았던 한결의 삶은 사상의 표현이며 생각의 표상이기 때문에 ‘사상가’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결이 사회를 어떻게 보았는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글쓴이는 한결의 삶과 생각이 모두 기독교 윤리 의식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의 가리침에 터해 온전한 인격을 수양하고자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결은 12살때 기독교 신자가 됐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앙의 영향으로 한결은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온전하게 인격을 수양하고자 했다. 한결에게 인격이란 “사람의 사람된 모든 속성, 곧 사람될 자격을 이름”이다. 특히 예수의 교훈 중에”하느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는 가르침은 “모순 없는 인격, 완전한 인격을 창조하려 함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 한결의 중요한 바탕이었다. 하지만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자기를 향한 관심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이나 지기 집안에 이익을 향한 좁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테두리를 넓힐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 밖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밖’ 지향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격의 완성을 향한 삶은 한결에게 적극스런 행동주의의 동기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을 향해 살고자 하는 한결의 삶은 분투의 기록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구절은 완전한 삶을 위한 실천의 과제였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가르침을 이 세상에서 실천한다는 것, 바꾸어 말하여 ‘신의 진리를 체현한다’하는 것은 사회에 참여하여 역사 속에서 분투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현실은 초월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의미 있는 행동과 실천을 하는 마당이다. 그 속에서 역사는 초월의 가치를 향하는 역동스런 ‘싸움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분투의 삶의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결은 개인과 사회를 한 유기체에 유추하여 볼 때, 사회는 한 생물체의 개체와 같다면 개인은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포의 생명이 곧 개체의 생명인 것같이 개인의 생명 이상의 종합이 곧 사회의 생명 이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 개인은 좁은 관심 세계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넓은 관심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웃’이라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행동할 때 온전한 인격 수양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삶에 뿌리로 두었던 한결은 인간이 만든 이념과 제도, 권위 관계와 지식 체계는 절대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그가 맑스주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에는 지식인이라고 하면 으레 맑스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던 시기였다. 한결이 공부하고 있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맑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나 ‘자본주의의 옹호자’라며 강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을 통해 역사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정신보다 물질의 지배력을 강조하는 맑스주의는 한결에게 설득력을 제공해주지 못하였다. 또한 인간이 역사 참여가 아닌 ‘사회 진화의 필연의 법칙으로 인해’ 무산 계급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식의 운명론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을 한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히려 한결은 기독교 안에 이미 사회주의의 이상이 있다는 점을 들어 맑스주의를 역공했다. 부자를 비판하고, 나눔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기독교는 가장 오랜 사회주의요, 가장 완전한 사회주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에 따라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차이점을 보인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구원하겠다고 한데 반하여, 공산주의는 투쟁이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투쟁은 ‘이기주의’를 낳아 약탈로 나가고 결국 인류를 멸망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고 한결은 말한다. ‘종교의 박멸’을 이야기하면서 ‘자유를 꺾는 전제의 행위’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 참된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한결은 모든 계급이 더욱 온전함을 향해 나가는 윤리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온전함을 향한 인격 수양을 바탕으로 거듭난 인간의 모임인 윤리 공동체에 희망을 바라본 것이다.
3. 한결의 교육에 관한 생각
한결의 교육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것도 기독교의 신앙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이 한결의 삶과 생각을 틀 지웠기 때문이다. 한결은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이다. 왜, 무엇 때문에 살며, 삶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번민하며 살았다.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지성과 도덕에 대한 문제의식과 섬세한 감수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한결에게 톨스토이는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한결은 “예수의 교훈과 이를 잘 설명하여 준 톨스토이의 인생관에 감격하고 공명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한결에게 “종교는 인생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생활을 이름”있었다. 인생의 목적은 완전함이었다. 완전함은 진리에 대한 관심과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는 초월의 가치와 기준을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진리’ 그 자체 이며, 진리가 내용이 되는 온전함의 속성을 지닌 무한함과 영원함에 이른다고 한결을 보았다.
한결의 교육의 목적은 “인생의 목적을 이룰 만한 인격을 완성함”이다. 그는 삶의 목적을 온전함을 향해 나가는 인격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교육의 목적을 끌어내어 교육을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인격의 속성은 타고났을 뿐이며 그것 자체가 완성품이지도 않고 완전품도 아니라고 한솔은 보고 있다. 인격 완성을 위해 고난을 돌파하여 삶의 목표가 되는 ‘저 언덕’을 향하여 쉼 없이 힘껏 노를 저으면서 가야만 한다고 본 것이다. 삶에 대한 실천과 투쟁이 삶의 목표이며,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결의 인격주의 교육관은 두 가지 차원에서 풀이할 수 있다. 하나는 불완전한 삶에서 완전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 즉 쟁투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삶 자체가 좁은 ‘나’의 세계로부터 넓은 ‘나와 우리’의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지향하는 것이다. 한결의 교육관은 제도의 개혁보다 사람의 거듭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한결의 교육은 도덕 인간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능이나 수단으로 전락한 조선시대의 교육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덕이라는 관심 영역이 양반 관료라는 지위에 오르는 도구로 사용되는 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교육과 배우는 뜻을 경제나 정치를 위한 이해타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학자는 진리를 목숨과 바꿀 만큼 진리를 사랑하는 날카로운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결은 말한다. 올곧은 교육관을 가진 한결은 삶에서도 억압스런 정치 권력에 굴복하거나 양심을 팔지 않았다. 앞에서 그의 삶을 풀어놓은 것처럼, 인격수양을 위한 교육과 배움의 자세로 살아갔던 그는 일생동안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다. 사회 이론으로 본 외솔과 한결
1. 개인과 공동체
먼저 글쓴이가 이 책에서 많이 이야기 한 것처럼 뒤르케임의 이론으로 외솔과 한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뒤르케임은 사회 속에서 평등하면서도, 개인으로는 자유로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꿈꿨다.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불평등한 구조를 없애는 것에 관심을 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덕성’ 강조 했다. 또한 현대 사회를 ‘유기 결속 관계’인 유기체로 보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급격한 구조의 변동으로 도덕의 진동상태로 위기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참다운 개인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뒤르케임의 개인주의는 동정과 긍휼, 정의의 마음을 갖는 ‘인간성의 종교’이며, 병든 사회의 치료약으로써 가치 의식인 것이다.
외솔과 한결은 모두 개인의 각성과 윤리 의식을 강조한다. 외솔은 갱생의 가능성을 아래로부터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았고, 한결은 인격 완성을 통한 사회변혁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회를 유기체로 본다는 것도 뒤르케임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솔 조선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질병에 의해 생기를 갖기 못하고 본다. 한결은 개인을 사회의 세포로 보고 있다 개인과 사회는 한 몸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만 이 책만을 바탕으로 본다면 한결은 외솔보다 사회가 ‘질병’에 걸렸다고 보는 관점은 조금 약하다고 할 수 있다.
2. 문화를 바꾸는 교육
앞에서 말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로버트 벨라의 ‘기억하는 공동체’, ‘도덕 실천의 공동체’와 맞닿을 수 있다. 벨라는 『마음의 습속 』이라는 책을 통해 문화와 사회의 밑뿌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정부의 행정지침이나 법으로는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실천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개인이 일어서기 위해서는 파아슨스가 말한 것처럼 자원 행위 이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파아슨스는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 인성, 문화 체계가 제도화, 사회화, 내면화를 통해 균형있게 짜임새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네 가지 기능의 패러다임을 말하는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이론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교육 혁명과 자원한 결사체를 집중해서 설명 할 뿐 아니라 문화의 바타이 되는 종교를 통한 도덕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외솔과 한결은 교육 사상가였다. 올바른 개인과 사회를 이루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특히 외솔은 나라 사랑에 따른 개인의 도덕성을 위해, 한결은 인격 수양을 위한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두 사람 모두 교육을 기능이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 민족 공동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벨라와 파아슨스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라.나가는 말 - 왜 민족 사랑인가
외솔과 한결은 개인과 공동체을 위한 삶을 살았다. 서로 엮여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도덕과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왜 나라사랑을 강조했던 것일까? 나랏말과 글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인가? 특히 외솔은 더욱 조선 민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보편스런 사랑을 주장했던 그들의 생각에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의문을 풀 수 있는 것은 외솔과 한결이 비판했던 맑스주의에 물든 레닌의 글 가운데서 오히려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닌은 1947년 ‘민족과 식문문제에 관한 테제’라는 글을 발표한다. 공산주의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범세계 운동이다. 그들은 민족과 국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레닌은 식민 문제를 단순히 민족 문제로 보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의한 제국주의의 횡포로 본 것이다. 잘사는 나라의 부르주아들이 더욱 돈을 벌기 위해 못사는 나라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 바로 식민주의이며 식민지 건설이라는 것이다. 범세계 노동자를 해방한다고 하면서도 민족을 이야기 하고 식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공산당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에서 민족과 나라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일 것이다. 물론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보편스런 인류애를 말하고자 했던 외솔과 한결이 민족의 문제에 깊이 관심 갖고 나라의 말과 글을 연구하고 헌신한 것은 식민지의 문제가 모든 인류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관점으로 민족과 나라를 바라 봐야 하는 것인가. 약한 자의 저항과 인류의 평화를 목적으로하는 '나라 사랑'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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