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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책

디딤돌이 된 바보, 망령을 넘어 상징으로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박성용 외)'을 읽고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

저자
박성용 지음
출판사
신앙과지성사 | 2010-09-27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개신교 신학자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하던 중 토착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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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때론 머리로, 때론 가슴으로 읽혀지는 것이 글이다. 글의 형식과 방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나 경전이 머리로 읽혀지기도 하고, 철학 서적이나 논문이 가슴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어느 가을날, 도서관에서 머리와 가슴이 화음을 만들며 일렁였다. 쉽지 않은 경험이다. 책의 구성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책장을 덮고 생각해봤다. 결론은 ‘변선환’이라는 상징이었다. 그 상징은 머리만으로, 반대로 가슴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보스럽지 않은 바보, 올꾼이 변선환, 한참 후에야 그 뜻이 슬며시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ㄷ. 인도만 여행다녀온 사람은 인도 이야기만 한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유럽이 처음과 끝이다. 다양한 곳은 이리저리 방황해 본 사람은 여행지가 아니라 여행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진다. 신익상의 ‘변선환의 신학 여정’이 남긴 여운이다. 방대한 신학의 탐험 속에서 변선환은 결국 종교라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낱낱으로 갇혀버린 신학의 이론을 넘어서는 그의 시도는 좁은 지식의 파편에서 움튼 것이 아니다. 그의 종교해방신학은 삶의 붓으로 쓴 기독교의 십우도였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해방은 중도이다. 대속만도 아니고 자속만도 아니다. 목동과 소가 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니듯이, 해방은 종교의 근본을 묻는 이에게 발현된 언설이다. 그는 극단으로 나아간 사람이 아니고 중도를 향해 나아간 사람이다, 싶었다. 


ㅅ. 기억에 남는 문장은 ‘나를 밝고 가라’이다. 제자들의 가슴 속 깊숙이 박혀 있는 그의 말이었나 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 에 나오는 화폭 속의 예수님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밟히면서 완성되는 역설, 기독론을 전공했던 그의 삶과 사상에서 우려나오는 말은 그 한 문장 속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바보가 된 디딤돌, 그를 밟고 신학과 삶의 루비콘 강을 건너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ㅁ. 저항과 탈주는 오히려 의존에서 나온다. 믿을 구석이 없다면 몸부림 칠 수도 없다. 애굽을 나온 히브리인들의 탈출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변선환은 그의 스승 부리처럼 하나님을 객관화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을 거절한다. 절대화의 늪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기득권들의 지배 아래에서 있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을 추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토착화는 잡종이 아니라 절대성을 만들어버린 있는 자들의 쇠우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종교개혁 정신인 소명과 금욕으로 인해 합리성이 깃들고, 사회가 자본주의화 됐지만, 결국 서구의 합리화가 오히려 쇠우리(iron cage)가 되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는 막스 베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학의 쇠우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모순되게도 의존이다. 그의 신학은 오히려 신앙스럽다고 말해야한다. 분별없는 노예 근성은 신앙과 사회, 정치와 경제 모두를 경계 짓는다. 박일준의 몸짓이 고마웠다.


ㅂ. “종교재판, 이단, 종교다원주의, 교리수호, 해방, 금란교회, 감신대, 근본주의, 토착화, 교회성장, 실존, 기도, 그리스도, 학장, 자유주의” 먹먹하기도, 답답하기도, 부담스럽기도 한 단어들. 그리고 그 단어들이 멤도는 생각의 매듭들.


ㄴ. 하나로 모든 것을 정리해버리는 욕심은 종교를 절대화했다. 율법을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변선환은 그것을 깨려고 했다. 그의 삶도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 다양한 면에서 정리가 아닌 설명을 해야한다. 박성용의 글은 따뜻했다. 그리고 다채로웠다. 인간을 느끼게 했다. 특히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거하려면,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실천이라는 선한 열매로 보여줘야 하다는 변선환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론가가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보려 한 것이다. 이론의 우월성을 버렸다. 그에게 학문이란 치열한 삶의 결과였다. ‘삶의 사람’이었기에 ‘책의 사람’이었다. 죽어서 사는 사람, 온 몸으로 틀을 깨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듣고 싶어졌다.


ㅇ. 처음으로 경찰과 맞부딪쳤던 것은 금란교회 앞이었다. 2000년이었다. 교리 수호를 외치던 세계 최대 감리교회 앞에서 방패를 밀치며 교회의 타락과 씨름했다. 부활한 예수가 사라져버린 껍데기 무덤과 같다는 느낌에 좌절했다. 그 안에서 마녀 사냥과 같은 종교 재판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실황을 촬영한 비디오도 보았다. 큰 목소리의 기도소리를 뚫고 정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던 그의 자세가 비춰졌다. 출교 처분을 받았음에도 자신을 내친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던 그의 뒷모습. 예수가 무덤에 머물 수 없었듯이, 그도 한국 감리교회라는 무덤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덤 속에 있던 그 교회의 목사는 이끼 낀 돌맹이만 굴리고 있다. 


ㄹ. 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에 겹쳐졌다. 역사가 역사로 살아났다. 최대광은 루터의 영화 한 장면과 변선환의 종교재판의 한 장면을 스치듯 그려냈다. 교황처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루터와 변선환이 지켜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교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정치의 문제이며 권력의 문제였다. 예수는 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는가? 유대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앞에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ㅈ. 망령이 종교재판을 일으켰다. 망령은 지금까지 감리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변선환’을 망령으로 본 교리수호위원회의 근본주의자들은 그를 출교처분 했다. 망령은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몫이 됐다. 억울한 그의 삶에 대한 한풀이 굿판만 열려고 했다. 그는 상징이 되지 못하고 망령이 되어 배회했다. 딛고 넘어서야 하는데, 망령 안에 갇혀가는 형국이다. 미완료된 그의 신학을 어떻게 부시고 넘어서서 더 나은 미완료의 신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다. 망령을 넘어 상징으로 그를 만나는 것은 그를 보는 것이 아닌 그가 보려고 했던 것을 바라보는 신학함의 자세에 있지 않을까, 싶다. 민중과 생태계, 사상과 종교로 찢겨나가는 이 땅과 바다 넘어 핍박 받는 수많은 생명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겠다. 새로운 올꾼이의 삶을 내딛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