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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책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그리며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덕주)"를 읽고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저자
이덕주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1-08-3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통일 이후의 신학을 준비한다!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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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을 넘어 박애 정신으로 : 기독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18~19세기에 서구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최대한 보장하는 자유방임주의가 사회의 주요 경제체제였다. 아담 스미스와 맬더스처럼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바탕으로 경제 해법을 찾고자 한 결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생겨나게 나게 됐다. 점차 한계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새로운 경제 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31년에 프랑스 개신교 신학자 알렉산드르 비네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대를 거듭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은 여러 갈래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회주의는 기독교 정체성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른 사회주의 운동과 대화와 협력을 모색한 운동 사상으로 공산주의가 본격 활동을 시작한 1948년 무렵에 출발했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이 사회에 빠르게 번지면서 교회는 고민을 시작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도 문제였지만, 혁명을 위해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주의도 기독교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3의 가치, 박애가 필요해 졌고, 스스로 나눔과 희생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사랑을 강조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글쓴이는 기독교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현실 속에서 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극으로 치달은 두 사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리스도인들이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꿈꿨던 하나님 나라를 정리하고, 구약과 신약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되짚어준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 본 하나님 나라 :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이다


글쓴이는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하기 보다 이 세상에서 이뤄질 새로운 세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임하며,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내세 지향성이 강한 선교 초기 한국인들의 특성에 따라 한국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지옥에 반대되는 ‘천당’으로 해석해 그 뜻을 축소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세계’라는 천국 개념이 ‘고통과 슬픔이 없는 천상 빌라’로 줄어 버린 것이다.


글쓴이는 오해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성경 본문을 통해 새롭게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다.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뤄지는 ‘새하늘’과 ‘새땅’은 주님이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이다. 글쓴이는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 신랑되신 주님이 임하시는 곳은 신부들이 있는 곳, 곧 이 세계라는 점을 주장한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늘의 뜻이 이뤄지는 곳은 땅이며, 이러한 이유로 지구 위에 무궁안식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길선주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는” 한국 감리교회의 교리 선언을 되새겨 봐야 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사람들 가운데, 곧 공동체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셋째, 하나님 나라는 실천하는 믿음에 의해 일궈질 수 있다. ‘천국 입장권’은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한국 선교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성서 본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문자적으로’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글쓴이는 강조한다. 넷째,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때는 알 수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혹으로 하나님 나라의 때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의 이야기처럼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우리가 알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율법 공동체 : 구약을 바탕으로


글쓴이는 구약 성경을 살펴보며 구약 시대에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스스로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인 만나 공동체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공동체는 보통 율법 공동체 혹은 계약 공동체로 불린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공동체를 만나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어떤 법이나 강제스런 계약이 아닌 먹을거리인 만나의 나눔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는 신비의 음식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음식이 골고루 균등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가 만나공동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자발스런 나눔으로 이뤄지는 가독교 사회주의의 지향점이다. “거둔대로 가진다”는 자본주의나 국가 통제와 제도를 통한 과학 사회주의가 아닌 제 3의 길이다.


둘째는  자비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안식년 평화 공동체이다. 글쓴이는 하나님의 율법 속에 나타난 소외계층과 빈곤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정신을 성경 구절을 통해 제시한다. 자비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의 가나안 공동체에서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에 담긴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라고 글쓴이는 강조한다. 이 규정들은 생산욕에 대한 욕망에서 해방시켜줄 뿐 아니라 어려운 처지 있는 사람과 가축 그리고 들짐승을 위한 규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는 땅의 공공성을 강조한 토지공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희년공동체이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가나안 정착 당시 골고루 평등하게 나눴던 땅으로 다시 나눠가져야 할 뿐 아니라 종들도 자유를 얻게 된다. “가난한 자에게 희망을, 부요한 자에게 나눔을” 위한 제도가 바로 희년 정신이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결국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스러울 뿐 아니라 성경과 신앙 속에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4.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하나님 나라 : 신약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 될 수 있는 참된 공동체 운동이 열린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정신을 제대로 지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율법 정신은 간 곳이 없고 율법만 남게 됐다. 하나님의 뜻이 담기 율법이 단순한 사회 제도 장치로서의 족쇄가 돼버린 것이다. 법과 제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젠가 하나님의 뜻이 억압의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성령을 주셨다. 예수는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고 왔다고 말하셨다. 율법에 얽매여 위선을 떨며 자신들을 우상으로 만들어가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고 참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완성은 성령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체험하는 개인이 없이는 율법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약의 공동체는 바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공동체이다.


글쓴이는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예수가 바라본 평화 공동체이다.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인 “메시아 공동체는 관용과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어 현실에서 모두가 함께 평화를 이루며 사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건설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예수는 “평화로 가는 지름길”은 불신과 증오가 아니라 “용서”에서 온다고 보았다. 물론 예수는 물질을 버리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경제활동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나눔과 베품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예수는 강조했다. 


둘째는 나눔과 섬김의 성만찬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던 성만찬 공동체는 나눔과 함께 섬김을 기본 요소로 삼고 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성만찬을 나누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말씀과 생명을 나눠 먹음으로 체질과 생명이 바뀌어 ‘같은 생명’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기원이 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근본 의미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됨”이다. 따라서 성만찬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계층과 신분을 넘어 서로 하나된 이들이 나눔과 섬김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공동체이다. 초대교회 성령공동체의 세 가지 특징은 물질의 공동 소유와 공동 사용, 공동 분배로 볼 수 있다고 글쓴이는 정리한다. 중요한 점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평등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에 나온 보혜사 성령은 “하고는 싶으나 혼자 힘으로 되지 않을 때 누군가 옆에서 길을 가르쳐 주고, 잡아 주고, 끌어 주면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되고, 그 말씀을 깨달아 그 말씀대로 행하여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곧 나눔과 섬김을 통한 평화 공동체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5. 나가면서 :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한, 그러나 힘있는 자들을 향한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생각이라는 확신에 가슴 설레며 읽어내려가긴 했지만, 책장을 덮으니 더욱 갈증이 밀려오는 듯하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뼈져리게 느끼는 터라,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기독교가 놓치고 있는 ‘사회주의’스런 생각들은 더욱 더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남는 가장 큰 갈증은 이런 것이다. 글쓴이가 성경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부자들을 향한 이야기이다. 천박하게 변해버린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이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구조 속에서 억압된 이들을 위해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생각임에도 정작 ‘가난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있는 사람들이 변해야 한다. 그리고 없는 사람들은 기다려야 한다. 폭력 투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공산주의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연대해 행동할 꺼리라도 있었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에서는 가난한 사람, 억압 받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제주 해군기지를 밀어붙이고, 4대강 사업이 진행되고, 쌍용차 사태가 발생해도 글쓴이가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는 강자들에 의해 당하는 약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급박한 악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무기는 무엇인가? 용서인가?


또 하나는 현실 적용의 애매모호함이다. 글쓴이는 지나치게 자발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스럽게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타고난 ‘동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인류사회에 더 적합한 경제 구조라고 주장한 애덤 스미스와 비슷하다. ‘성령’을 바탕으로 평화 공동체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은 일반 사회의 법과 제도를 넘어선 기독교 테두리 속의 수도원 운동 정도로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세상, 온 세계에 이뤄질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면 차라리 기독교라는 용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에서만 인정하는 성경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이뤄질 평화 세상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설득 가능한 것일까? 기독교인들만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필요할까?